[이벤트] 명량대첩축제
  관리자   2017-08-24 06:03:04     142

시대적 배경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정유년(1597년) 7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패배하여 거의 괴멸됨으로써 서해안으로 일본 수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이 시작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함.
•백의종군 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장흥땅 회령포에서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여 후퇴하면서, 한편으로 명량에서 일본 수군과 결전을 모색함.
•1597년 음력 9월 16일에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수군 13척은 울돌목 즉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과 접전을 벌여 그 중 31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음.
- 12척 문헌기록 : 충무공 행록 (이분 지음)
- 13척 문헌기록 : 선조실록, 사대문궤
- 12척 혹은 13척 어느 것을 써도 무방할 것으로을 판단됨.

역사적 의의
•명량대첩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 이후 수륙병진 전략으로 호남을 석권하고 한성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정유재란의 흐름을 뒤바꾸었음.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막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안을 무인지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강과 대동강, 압록강까지 도달하게 되어 명의 지원을 단절시키고 조선을 점령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에 명량해전 승리는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함.
•이순신이 불과 13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의 함대를 격멸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전쟁 지휘 통솔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이며 의로운 전라도민들의 구국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됨.
명량대첩의 배경
•선조 30년(1597년) 7월 7일에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의 칠천량 해전에서 40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척의 전선이 12척이 남게되는 대참패를 겪음.
•7월 23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임명하여 수군의 재건을 맡김.
•최악의 여건이었지만 이순신은 8월 3일부터 8월 17일까지 전라도 남방 330여km를 우회하여 부임하면서 병력과 군량 및 무기를 갖춤.
•이 결과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고 전라우수영에 계류중이던 전선 1척을 포함하여 총 13척의 전선으로 무장함.

※ 명량해전과 관련 사료마다 12척, 13척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모두가 틀린것이 아님.
•8월 19일 회령포에서 승선하여 명량 방향으로 후퇴하면서 4회에 걸쳐 왜 수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왜 수군을 유인하여 섬멸하는 계획을 수립.
•8월 29일 명량 입구에 위치한 벽파진에 주둔함.
•9월 15일 벽파진에서 싸움이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우수영으로 진을 옮김.
•9월 16일 양도 앞바다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상대로 명량 대첩을 거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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